괴로움의 요요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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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3-12-22 20:33 조회226회 댓글0건본문
괴로움의 요요현상은
견해가 바로 서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많은 명상법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합니다. 자유와 평정의 강, 건너편으로 옮겨다 주는 나룻배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거지요.
진정한 깨달음의 상태, 즉 대자유와 평정의 상태는 기쁨도 슬픔도 아니며 행복도 불행도 아니며 빛도 어둠도 아니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거지요.
우리가 전생을 통해서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지인 깨달음의 상태는 그런 이중성을 담고 있지 않는다고 봅니다. 무섭게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알고보면 쉽지만...)
감각적이지 앓기 때문에 해석도 불가능했던 거지요.
여직 느껴보지 못한 심적 상태이니까요. 저는 깨달음을 ‘바른 견해’로 봅니다.
자유와 평정을 안기는 '바른 견해',
우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알아야 할 것은 ‘바른 견해’입니다. 명상하는 이유는 현상을, 이치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쌓아 온 업(카르마)은 바르게 알아야 정화됩니다. 그리고 그 이루에 꼴이 바뀝니다. 몸의 꼴, 마음의 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펼쳐지는지 알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존재한 후에 펼쳐지는 일이니까요.
모든 현상은 나의 의식, 나의 인식 안에서 펼쳐지는 일입니다.
인식의 틀이 두터워 그 틀을 벗어나서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에(여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에고의 분별심’를 벗어나는 것인데 에고에게는 죽음이기 때문에 결코 에고는 호락호락 자기 자리를 참본성에게 내어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를 잘 못 알아서 망상이 시작된 것이고, 외부대상을 잘 못 알아서 번뇌가 시작된 겁니다.
나를 모르면 아집이 생기고, 대상을 모르면 법집이 생깁니다. 이 둘은 모두 괴로움을 초래합니다.
나와 대상 이 둘을 바로 볼 수 있는, ‘직지인심’이 어려우므로 명상수행이 시작됐던 거지요.
만들어진 ‘나’-‘에고’ 안에서의 인식은 찌그러진 빵틀에서 나오는 빵과 다르지 않습니다. 틀이 찌그러져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빵도 다 찌그러져 있겠지요.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 망상, 허상, 환영, 꿈, 물거품, 허깨비, 뜬구름, 그림자, 신기루, 아지랑이 이런 것과 다르지 않겠지요.
나는 외롭다, 나는 괴롭다, 나는 착하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정직하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상처받았다, 억울하다, 분통하다, 못됐다, 나쁘다.... 이런 모든 판단들이 알음알이에 불과하며 정견이 아니라는 겁니다.
입을 열면 그 즉시 엉터리가 되고 맙니다.
어쩔 땐 생각이 아편이라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하지만 독이 약이 되기도 하듯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이 있어 그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 것도 더듬게 되는 기회를 선물받습니다. 즉 진리를 향해 가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번뇌가 보리다'라는 안팎을 한방에 깨는 통쾌한 말도 나오게 된 거지요.
진정한 정견은 정견이랄 것도 없지만 허공같이 넓은 지혜 안에 있게 합니다.
첨언-
저도 향해가고 있는 중의 한 사람입니다^.^
-나봄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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